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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전차 381호’ 원형 복원 전시

부서
광장동
작성자
수정일
2009-09-15
조회수
631
첨부파일

 



 


1930~60년대 서울시민의 발 , 서울전차 , 41년 만에 부활되다. !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381호’ 원형 복원 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381호’ 원형 복원 전시


 


- 전차 381호, 41년 만의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시민들 곁으로...


- 서울 시민과 함께 근현대사의 길을 달리던 전차가 원형그대로 복원ㆍ보존처리되어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에 전시


- 가이드 투어 및 교육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시민 학습의 공간으로 거듭날 예정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은 1930년대부터 1968년 11월 29일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으로서 시민들의 발이 되었던 전차 381호를 41년 만에 원형대로 복원하여 전시하였다.




□ 서울 전차의 역사와 전차 381호의 연혁




- 일본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전차가 등장하다.




   ○ 110여년 전 대한제국기 시절, 딱히 대중교통이라 부를만한 것이 없었던 때에 처음 등장한 전차는 매우 놀라운 근대 문물의 상징이었고, 동양에선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빠른 등장이었다.


 


- 전차 381호, 서울 시내를 달리다.




   ○ 전차 381호는 1930년경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日本車輛製造株式會社)에서 제작한 반강제대형보기차(半鋼製-大形Bogie車)1)이다. 이 전차는 길이 13.7m, 너비 2.4m, 높이 3.2m, 무게 약 18ton, 탑승인원 100명으로, 전차사업의 최전성기인 1930년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제 부품의 적용과 함께 가능한 승차인원을 늘리고자 차량의 내ㆍ외부가 대부분 개조되었다. 381호 전차의 행선지는 보존처리 과정 중 전차 내부에서 수습된 표지판으로 보아 을지로를 중심으로 운행한 것으로 보이나, 효자동에서 용산까지 운행하였다는 증언도 있어 여러 노선에 투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968년 11월 30일 서울 시내에서 모든 전차 운행이 정지되면서 대부분 전차들은 폐기처분되었는데, 다행히 381호는 1973년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개장 때 공원에 전시되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복원 ㆍ 보존 처리과정과 성과




- 전차 381호, 복원과 보존처리 과정을 통해 되찾은 옛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 2007년 12월 어린이대공원으로부터 전차 381호를 인수하였다. 인수 당시 전차의 상태는 외부는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으며, 지붕과 내부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식이 심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은 전차 381호가 더 이상 손상이 진행되지 않도록 보존처리를 진행하는 한편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자료조사와 고증작업을 실시하였다. 먼저 전차에 대한 각종 사진자료를 확보하였으며, 차량제조회사인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를 직접 방문하여 381호 전차의 제조형식인 반강제4륜보기차(半鋼制四輪 Bogie車) 도면을 입수하였다. 또한 일본철도박물관, 일본국립과학관, 신주쿠역사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는 전차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 전차 원형복원 작업은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진행되었으며, 가급적 차량의 원형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부품이 망실되었거나 부식이 심하여 재활용이 불가능한 경우 고증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내부는 전차의 제조사인 일본차량주식회사에서 입수한 도면과 보존처리 전의 남아있던 상태를 근거로 실시하였다.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차량의 색깔은 (주)삼화페인트에 의뢰하여 하부는 녹색, 상부는 아이보리색 등 원래 색으로 복원하였으며, 주요부품인 집전장치(뷔겔, Bügel)와 주간제어기(Master Controller)는 국립서울과학관과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 남아있는 실물을 근거로 복원하였다.


   


 


- 잃어버린 세월의 흔적을 찾다.




   ○ 한편, 복원 ㆍ 보존처리 과정에서 6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계몽문구들이 벽면의 구 페인트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다. 즉 ‘출입구 막지말고 좌석은 노유에게, 불평따라 간첩오고 자랑속에 비밀샌다, 노약자와 어린이는 보호석으로 안내합시다, 전차 안은 서로서로 깨끗이’로 당시 전차승객들이 지켜야할 공중질서와 사회적인 관심사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서울시운송사업부(66년~68년 전차 운영부서)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금속 명패도 출입문과 창문에 부착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전차를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는 점 이외에도 당시 사회적인 관심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전차 381호의 역사적 가치와 활용 계획




   ○ 그 동안 약 1년 8개월간에 걸쳐 복원 ㆍ 보존처리 된 전차 381호는 당초 예상하였던 것 이상으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전차의 구조나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더욱이 1899년 5월부터 운행이 시작되어 1968년 11월까지 약 70년간 서울 시민의 발이 되어왔던 전차는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국립서울과학관에 전시 중인 363호 전차와 함께 이번에 복원되어 공개되는 381호 단 2대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 희소성에 있어서 매우 귀중하다고 할 수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당초 전차를 실내까지 완전 개방하여 시민 체험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전차의 보존 상태나 역사적 가치, 희소성 등을 고려할 때 보다 적극적으로 전차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외부는 전면 개방하더라도 실내의 경우 전면 상시개방 보다는 가이드 투어프로그램이나 교육프로그램 등을 마련하여 제한적으로 개방할 예정이다. 아울러 전차 381호를 등록문화재로 지정 신청할 계획이다




※ 야외전시물(전차 381호, 시전행랑유구) 개막행사


   - 일시 : 2009년 9월 15일(화)  11:00


   - 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야외전시장


  


우리나라 전차의 역사





   서울 시내에 전차운행이 처음시작된 것은 대한제국 때인 1899년 5월 17일부터로 운행구간은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였다. 그 이유는 고종황제의 청량리 홍릉(명성황후의 능) 행차를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사후, 고종 황제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청량리 홍릉을 빈번하게 행차하게 되었는데, 그때 마다 가마를 탄 많은 신하들을 거느림으로써 한번에 드는 경비가 10만원 안팎이나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짐작한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 보스트위 등이 고종에게 접근하여 전차를 가설하면 행차 비용도 절감되고 백성들도 편리하게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고종도 여기에 동감하여 한미합동으로 전기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어 1898년(광무 2) 2월 19일 황실에서 40만원과 35만원을 두 차례에 나누어 출자하기로 하고, 칙명을 받은 대한제국 육군총장 이학균(李學均)과 콜브란 간에 전기사업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콜브란은 서울의 전차, 전등 및 전화 가설과 운영에 관한 특허권을 얻게 되자 우선 전차가설을 계획하고 일본인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1898년 2월 17일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 25일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5마일 궤도공사를 준공하였다. 또한 동대문 안에 발전소 부지(현 동대문종합쇼핑센터 자리)를 선정하고 75kw 직류 600V 1대, 100마력의 증기발전시설을 병행하였으며, 차량 조립도 마쳐 1899년 5월 17일, 음력 4월 초파일을 기하여 성대한 전차 개통식을 가졌다.


  참고로 도시교통수단으로 노면전차가 최초로 등장하 것은 1881년 독일 베를린에서 였으며, 동양에서는 1894년 일본 경도(京都)에 등장한 것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 1899년, 부산에 1915년, 평양에 1923년 각각 전차가 개통되었다.


   이후 전차운행은 새로운 노선이 신설되거나 기존 노선이 연장되는 등 급속하게 늘어났다. 일제강점기 전차는 큰 호황을 누렸고 1950ㆍ60년대 까지 대중교통 수단으로 서울 시민들의 발이 되어왔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버스, 자동차 등과 경쟁하면서 적자가 누적되어 운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차량이 노후화 되고 속도도 느려 오히려 버스나 자동차 운행에 방해가 되자 1968년 11월 29일 운행이 중단되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600년사(史)’는 전차 도입 배경을 이렇게 전한다.


1899년 5월 17일(음력 사월 초파일), 서대문∼청량리 간을 잇는 전차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귀족·고관·각국 사신 등을 태우고 화려하게 장식된 전차가 줄지어 “댕 댕”거리며 종로거리를 지나자 이 ‘기묘한 괴물’을 지켜보려는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처음 투입된 전차는 모두 9대, 1대는 황실 전용이었다. 정차장은 없었고 사람이 손짓하면 아무데서나 멈췄다. 전차를 타기 위해 일부러 시골에서도 올라올 만큼 인기를 끌다보니 전차를 타는 것도 쉽지 앉았다. 어렵사리 승차한 사람도 내릴 생각은 않고 종일 타고 다녀 전차 속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탑승객이 증가하면서 노선도 종로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1899년), 다시 남대문에서 용산까지(1900년1월) 연장됐다. /조선




1899.5.4 - 국내 최초로 동대문-흥화문 간 전차 개통식


이날 오후 3시 개통된 전차는 대중교통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전차 운행을 맡은 한성전기회사는 고종과 미국인 공동 소유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고종이 단독출자한 황실기업이었다. 고종은 1896년말 이래 주한 미국공사 앨런 및 경인철도부설공사의 청부인으로 조선에 온 콜브란과 만나 황실기업으로 하되 건설과 운영은 콜브란이 맡기로 했다. 그러나 러시아 등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이근배, 김두승의 이름으로 1898. 1. 18에 회사를 세웠고 1898. 9.15 경희궁에서 기공식, 12.25에 서대문 - 홍릉간 10km 공사를 끝냈다. 당시 홍릉에 명성황후능이 있어 고종이 홍릉까지 노선을 주장했다. 일반시민이 전차를 이용하게 된 것은 5.20부터인데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정거장이 따로 없어 승객이 손을 들면 전차를 세워 타고 내릴 수 있었다. 5.26 파고다공원 앞에서 철로를 건너던 어린아이가 치어 죽는 첫 교통사고가 일어나 성난 시민들이 전차를 부수고 불태웠던 일도 있었다. / Google


국내 최초의 전차 개통식을 찍은 사진이 발견됐다. 1899년 5월 4일 오후 3시 개통식을 구경하려고 구름 같은 관중이 동대문 성벽까지 올라가 있다. 동대문 앞의 지붕 건물은 전차 보관소. 당시 미국에서 발행되던 주간지 '콜리어스 위클리(Collier's Weekly)'에 화보 형식으로 실린 것을 근현대사 사료 수집가인 김영준(54)씨가 최근 캐나다에서 입수했다. /Google









1) 앞뒤 두 대의 차대 위에 차체를 올려놓아 자유롭게 회전하는 차량을 보기(bogie)대차라고 한다. 차대와 차량은 거의 독립적이라 할 만큼 분리되어 있어 차대가 자유롭게 회전하는데, 곡선 운행시 매우 안정적이고 유리하기 때문에 대형 차량에 주로 채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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